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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도이칠란트 복훔 한인교회에 실었던 글이 어느날 아무 경고도 없이 삭제당한 글을 서범석님께서 얼숲[페이스북]에 올리신 글을 다시 갈무리하여 옮겨 왔습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한인 교회

1977년 5월 18(수)일은 내가 취업광원으로 도이칠란트에 첫 발을 디딘 날이다. 기대에 부풀었던 꿈을 안고 도착한 곳은 도이칠란트에서도“아오지탄광”이라 일컫는 레클링하우젠 Ewald 광산이었다. 촌닭이 시골 장에 온 것처럼 어리벙벙한 눈으로 광산 기숙사에 도착하여 먼저오신 선진들이 베푸는 환영을 받고서, 앞으로 살아가며 준비하고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만나는 선진마다 “왜, 하필이면 이 광산에 오게 되었느냐?”고 탄식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모든 운명은 하느님께 맡기고 긴장을 풀면서 차분하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준비했다. 다음날은 Ewald 광산측에서 환영식을 베풀었다. 환영식을 마친 뒤에 관광버스를 타고 시내 명소를 다니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어수선한 경황에도 술렁이는 풍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어떤 이는“서형, 교회에 다니시오? 교회를 나가시더라도 그 Bochum 교회는 나가지 마시오. 그 교회는 빨갱이교회입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질문을 했다. “그래요? 우리는 출국하기 전에 소양교육을 받으면서 그러한 불순단체나 이상한 사람을 보면, 대사관에 신고하라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빨갱이 교회를 대사관에 신고를 해야지요?” 했더니 “자세한 설명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서형이 직접 가서 보시고 결정하시되 후회는 하지 마세요.” 한다.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분위기에서도 Bochum 교회에서는 여러 집사님들이 수시로 찾아오셔서 우리 동기 서른여덟 명을 설득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절대로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마세요.” 모두들 술렁거림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호기심만 더해갔다. ‘Bochum교회가 빨갱이교회라면 그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도 빨갱이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빨갱이들을 왜 아직까지 대사관에 신고는 하지 않고 새로 온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더욱더 궁금하기만 했다.

그때 복훔 지역에는 다른 교회가 없었고 레크링하우젠 광산 기숙사에서 몇몇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빨갱이교회가 아닌데도 교인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또한 이상하게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그 교회에 대해서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 교회는 회사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며 야유하는 투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 말이 맞는지 구분조차 하지 못 할 정도로 마음에 결정을 하지 못 하고 있을 때, 선진으로 오신 한(韓) 집사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그 분은 서울에 있는 충현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시다가 오신 분이다. 나보다 연세도 많으시고 서울에서 조그마한 시계점을 하셨는데 몫이 안 좋은 곳이라서 장사가 잘 안 되어 취업 광원으로 오셨다는 분이었다. 그러한 이름이 난 보수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대부분이 진보하는 교회를 꺼려하는 데, 그 집사님은 예외였다. 특별히 나를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교회도 다니지 않는 선진들이 터무니없는 낭설을 퍼뜨려서 선량한 우리 교인들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빨갱이로 보이는가요?” 하시고는 “그러한 낭설에 휘말리지 말고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종합한 다음에 결정하시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다음날은 Bochum 교회 담임이신 장성환 목사님께서 우리 동기들을 환영하러 오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누가 무어라고 협박을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부푼 기대와 들뜬 마음으로 다음날 오신다는 장성환 목사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환영예배를 보게 되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하신 그 말씀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다. “누구한테나 골고루 나눠드리는 거룩하고 심오한 복음을 여러분들께 드립니다.” 우리 동기들은 그날 설교말씀에 감동되어 두고 온 겨레와 가정에 대한 울적했던 생각들이 사라지고 희망에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다짐을 하게 되었다.
환영예배가 끝난 뒤에 Bochum 교회에서 준비한 다과와 음료수로 환영잔치를 하였다. 누구나 궁금했던 빨갱이교회에 대한 질문은 끝이 없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장성환 목사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으로 답답했던 우리 마음을 후련하게 풀어주셨다.

“여 러분!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요? 민주주의는 볼 수 있는 자유, 들을 수 있는 자유,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여러분! 우리나라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들이 바로 두고 온 겨레를 위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일꾼들입니다.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라면 불의를 보고 침묵하거나 외면하면, 그게 바로 죄가 됩니다.” 좁은 지면에 그때 감동받았던 말씀을 그대로 다 옮길 수가 없다. 모두들 굳어있던 표정이 밝아지고 평소에 믿지 않던 동기들이나 신앙생활을 게을리 했던 동기들도 말씀에 충만한 은혜를 받았으니 오는 주일에는 모두 Bochum 교회에 나가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누구든지 외국에 나갈 때는 남다른 결심을 한다. 애국심을 더 키운다거나, 신앙심을 더욱더 돈독하게 한다거나,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살아가는 데 반영시키기 위하여 마음에 다짐을 하고 왔을 것이다.

드디어 주일날이 되었다. Bochum 교회에서 승용차가 있는 분들은 모두 광산 기숙사에 새로 오신 동기들을 모시러 왔다. 광산측에서는 여권도 압수했기 때문에 멀리 갈 수도 없고, 며칠 동안 광산기숙사 근처에서만 서성이던 우리들한테 자가용으로 Bochum 교회로 모신다니, 모두들 여행하는 기분으로 교회에 갔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혹, 경계하는 마음으로 Bochum 교회에 나오신 분들이 있었다면 세월이 지났으므로 그 때 그분들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빨갱이 잡자’는 둥, 농담 반 진담 반 조심스럽게 경계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빨갱이라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애국심이 물씬 풍기는 민족교회라는 더 좋은 인상을 받았다. 함께 간 동기들도 그러했다. 그리하여 그 첫날 예배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문제는 그 다음 날부터 시작이다. 누군가 아무 근거도 없고 잇속도 없는 낭설을 퍼뜨려 새내기 동기들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그리고 그 수법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그렇지 않아도 두고 온 처자식과 고향생각뿐 아니라 어학교육에다 물도 맞지 않고 음식이 맞지 않아 심신이 피곤한데, 선동자들은 교회에 갈지 안 갈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까지 밤잠도 자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공갈과 협박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그때 한 집사님과 나는 그야말로 피곤한 몸을 무릅쓰고 “쓸데없는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말자”고 동기들을 설득하는 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Bochum 교회에 다니다가 무사히 귀국하신 분들과 연락도 하면서 모두들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증언도 했다. 그러나 훼방꾼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악랄한 방법으로 비웃기도 했다. “하하, 지금은 아무 탈이 없는 것 같으나 앞으로 삼년 뒤에 여러분들이 귀국할 때 김포공항에서 기다리는 처자나 식구들도 못 만나고 까만 세단차로 납치되어 남산으로 가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있어요?”그 말속에는 이미 협박하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면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 숫자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얼추 파악하기로는 동기들 절반 정도가 평소에도 한국에서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는 분들이었다. 동기 가운데 안식일교인 두 분은 어떻게 알았는지 칠백 여리나 되는 Frankfurt에 안식일교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토요일에 그곳까지 예배를 드리러 간다고 했다. 도이치교회라서 말이 안 통하더라도 안식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멀리까지 참여하시는 분들을 보았을 때 교파관념이 철저하다고 느꼈으나, 오히려 대단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먼 길도 마다않고 참여하는 정성을 보니, 저절로 존경이 갔다.
달이 가고 해가 지나, 계속되는 교회박해로 레크링하우젠 광산에 같이 왔던 동기들은 마지막으로 나 혼자 외롭게 남았다. 다행히도 그 동안 우리 광산에는 후진들이 두 차례나 왔다. 그 가운데는 의식이 뚜렷한 애국청년들이 있었기에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던 나한테는 큰 위로가 되었고 힘을 합하여 전도에 힘쓰고 나라 안에서 탄압과 박해로 고난당하는 이웃들을 위한 홍보에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외 개발공사에서 어학교육을 같이 했던 동기들이 다른 광산에서 일하다가 복훔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나와 장주범님 그리고 고(故) 한양님 이다. 그러자 1978년 첫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 그 때는 유신 말기였고, 민주화 열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사기가 충천하던 때였다. 그리하여 NRW 한인교회연합회에서는 그동안 침체되었던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하여 교회를 통하여 부활주일에 연극을 하기로 하였다.

이미 1970년 5월 김지하 시인이 쓴 “5적”이라는 담시를 사상계에 발표하여 특권층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 하는 내용처럼 과감하게 불의에 맞섰던 저항시. 그 담시로 말미암아 김지하 시인은 “5적 필화사건” 이라는 명분으로 수배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출옥하여 1973년에 쓴 담시가 바로 “금관예수”이다. 그때부터 철저한 검열을 통하여 금지했던 “금관예수”는 작곡가 김민기 선생이 곡을 붙여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이칠란트에 까지 널리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더구나 김지하 시인은 그때까지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을 때였다. 그렇게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기에 옆 사람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겁이 많고 무지했던 우리들이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갇혀있는 김지하 시인 같은 분들을 생각함으로 해서 의식을 일깨워주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70년대를 대표했던 담시 “금관예수”는, ‘나는 바리새주의자가 아니라’고 자처 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읽고 들어볼 만한 내용이다. 그러한 “금관예수”를 김지하 시인이 바라는 대로 교회에서 연극을 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나라 안에서 고통당하고 탄압받는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하여 NRW 한인교회연합회에서는 1978년 3월 19일 부활주일에 발표할 연극을 준비하였다. 원제목은“금관예수”이나, 그때 붙인 제목은 “해바라기” 였다. 밝은 앞날을 향한다는 뜻이다. 그 때는 일곱 교회였는데 예수역을 할 수 있는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오랫동안 물색 하다가 드디어 Bochum 교회에서 내가 예수역으로 주연을 하게 되었다. 등장하는 사람은 예수와 탄압받는 목사, 그리고 삯꾼목사, 돈 많은 장로(사장), 거지와 창녀, 문둥이, 그 밖에 시민들과 선량한 교인들이다. 대략 스무 사람 정도가 출연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 딴에는 주역으로 뽑힌데 대한 자부심으로 주일예배만 끝나면 기차를 타고 뒤스부륵 교회까지 가서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힘든 광산일을 하면서도 교회생활을 통하여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위로를 얻으며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교회에서 하는 연극에 예수역을 맡으므로써 또 다른 박해가 시작되었다.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고향 선배님께서 찾아오셨다. 조용히 할 말이 있다기에 무슨 ‘좋은 소식인가?’ 하고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윽고 말씀 하시기를, “내가 자내를 동생같이 생각하여 아끼는 마음으로 하는 말에 귀 기울이기 바라네,” 하시면서 “듣자하니 이번에 그 교회(NRW…)에서 하는 연극에 자네가 주연을 맡았다면서?” 그러면서 이야기는 계속된다. “내가 알기로는, 다른 역은 대부분 미혼이라서 지금처럼 탄압이 심하고 시끄러울 때는 여기서 혼인을 하여 미끄러지면 살아남을 수가 있지만 자네는 처자가 한국에 있지 않은가?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저렇게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서 팔팔뛰는 판에 왜 하필이면 자네가 주연을 맡았어. 그냥 뒷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역만 맡아도 문제가 덜 될텐데 하필이면 주연이야?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모두들 자네이야기로 술렁이고 있다네. 한마디로 자네는 겁이 없다 이거야.”
전혀 생각지도 않은 귀띔을 하신다. 그러면서 잠간이지만 내 머리를 스쳐가는 게 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미혼이고 나는 고국에 처자가 있기 때문에 귀국을 하게 되면 혹시라도 그러한 일로 해서 무슨 뒤가 안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러면서 언뜻 생각하기를 그러한 말을 듣고 내가 ‘비겁하게 생각을 달리 하게 되면 불의에 맞서는 세력을 향하여 기를 꺾으려는 세력들이 호시탐탐 그러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좌절하게 함으로써 민주화 열기에다 찬물을 끼얹는 꼴을 만들려고 그러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는 단호하고 담대하게 응수했다.
“선배님,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불의에 맞서서 항거하며 그러한 일을 위하여 과감하게 외치는데 무어가 잘 못 되었다고 선배님까지 그러세요? 독립투쟁을 하시던 우리 선조들은 그보다 더 혹독한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부모나 형제나 처자와 재산까지도 다 버리고 나라를 위하여 장렬하게 희생하신 분들도 계시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저는 부끄럽게도 독립투쟁을 하셨던 선조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하게 하지도 못 할 뿐더러 먹고살기 위하여 취업으로 와서 의식을 일깨우는 연극에 참여하는 일 조차 겁을 내어 포기하라는 말씀인가요? 제 양심으로는 그러한 일로는 이번 일을 포기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지조를 굳건하게 지켰다.
지난 ‘91년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이후에 김지하 시인은 한때 “굿판을 걷어치워라” 하는 망언을 해서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던 시인이라 해서 요즈음은 김지하 시인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변절한 시인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티격태격 하다 보면 좋은 시구가 가려서 그냥 지나칠 것 같은 아쉬움으로 지난날과 시(금관예수) 내용을 상기하면서 노래로 만든 금관예수를 여기에 싣는다.

금관예수

1.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에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2. 아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

아!

캄캄한 저 곤욕에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푸른 숲 아, 거기에 있을까

후렴: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그 무렵 1976년에는 재야인사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분들이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발표를 했었다. 문익환 목사님께서도 그 가운데 한 분으로 1978년 감옥에서 쓰신 옥중시를 읽으면서 내 자신이 불의를 보고 침묵을 지키면서 살아왔던 게 얼마나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 시-

나는 죽는다
나는 이 겨레 허기진 역사에 묻혀야한다
두 동강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
내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
아!
그 말만 생각하자
그 말만 믿자 그리고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이 밤에도
죽음을 살자

위와 같이 문 목사님께서 쓰신 옥중시가 생각났다. 마지막 심판 날에 심판을 면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생각하여 과감하게 맞섰다. 얼핏 듣기에는 선배가 했던 얘기가 고마운 말 같으나 나를 겁쟁이로 만드는 회유책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해도 그 일을 해야 하는 데 그렇다고 빠지고 저렇다고 빠지면 그 일을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그러한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용감한 뱃장이었다. 뱃장하나로 살아왔는데 그때 역시 뱃장으로 내 몫을 하게 되었다. 사상과 종교에는 자유가 있다.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생각을 바꾸거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날이 갈수록 철저한 신앙관을 다지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할지라도 교회는 사회를 외면 할 수 없다. 다윗왕 앞에서 슬기를 보여준 나단선지나 강도 만난 이웃을 보고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그냥 지나가는 레위사람이나 제사장, 헤롯왕 앞에서 과감하게 외쳤던 세례요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이러한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그까짓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불의에 굴복하며 정의를 외면하던 교회들을 생각하면, 나 한 사람이라도 불의에 맞서는 신앙심과 애국심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는 군부독재시절에 군 생활을 했고, 그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에 탄압당하는 이웃들을 외면 한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라 생각했다. 이곳에 와 보니 나라 안에서 가려졌던 모든 음모가 벗겨지는 안개처럼 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탄압받는 민중을 위하여 사회정의를 외치는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부치며 온갖 탄압을 하던 장면이 눈에 환하게 비치고 있는 데 내가 어찌 모른 체하랴!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연사건처럼 가려졌던 사건들을 뒤늦게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빨갱이, 조국 광복과 함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던 애국세력을 저지하려고 만든 말이 빨갱이였다. 그러한 말들이 와전되어 취업으로 외국까지 와서 피땀 흘려 일하는 광원들한테까지 반공을 앞세우는 무기로 등장했다. 이제는 참과 거짓을 분간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보다 더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백성들 눈을 가렸다는 것과 1974년 10월 24일 동아투위사건 이후부터, 기사 가운데 광고가 들어간다거나 심한 경우에는 공백으로 보도 했던 모든 게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 했다는 것도 이곳에 와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의를 위하여 억압받는 민중 편에서 과감하게 투쟁하는 그 세력들을 향하여 “빨갱이”라면 차라리 나는 그 빨갱이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유신말기까지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철저하게 언론 통제를 받을 때, 나라 밖에서는 친정부계와 친북계, 그리고 중립을 지키는 정론지가 있었다.
그 정론지를 이곳에서는, 카나다에서 만든 “제 3일”(장공 김재준 발행)을 통하여 눈과 귀가 열리게 되었다.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을 뜨게 되었다. 믿음이 약해서 잘 믿지 못 하는 것도 하느님 앞에서 죄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는데, 거기에다 빨갱이라는 모함까지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알고 보면 터무니없는 공갈과 협박에 굴복하여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나간다거나 아예 교회를 안 나가는 이웃들을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단단한 쇠는 뜨거운 불속에서 연단되고 잔디는 밟을수록 뿌리가 더 튼튼하게 잘 자란다고 한다. 그렇듯이 탄압이 심할수록 더욱더 저항의식도 튼튼하고 강하게 다질 수 있다는 논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흔들리지 않고 내 믿음을 지켜나갔다. 억울하게 끌려가서 갇히고 고문당하는 민주인사들을 석방하라는 데모도 열심히 했고 탄원서에 서명도 했다.
“세상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언제나 즐겨 부르는 이러한 찬송을 부르면서 위로를 얻고 굳건한 신앙노선을 지켜갔다. 살아가면서 가까이 있는 교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 까지는 Bochum교회가 불의를 향하여 외칠 수 있고 살아있는 교회라는 자부심도 강했다. 그리하여 그 당시 Bochum교회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교회가 사회에 모범을 보여주는 민족교회로 성장하는 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그 무렵에 장성환 목사님께서 시무하셨던 교회가 NRW 지역에만 일곱 군데 교회가 있었다. 위에서 언급 했듯이 그러한 박해는 Bochum지역뿐 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한 교회들이 사십 여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더 든든한 발판이 되어 민족교회 노선을 이어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더 열심히 참여하고 뒷받침을 다 하지 못 했던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한다.